16세기의 아주 훌륭하고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필립 네리(Philip Neri)는 교황의 심부름으로 로마 부근 수도원을 방문했다. 이유는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고 그녀가 성녀로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던 것이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했다. 그는 자기 앞에선 그 수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 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겨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많은 명성을 얻고 있던 자신이 그런 일을 요구 받는 것에 몹시 화를 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교황에게 “이젠 궁금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엔 성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이다.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가장 위협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이 실패했던 지점도 바로 여기이며, 여전히 사탄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가장 무서운 것은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만을 알지 못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일 것이다. 자신을 ‘의’로 포장하며 자신이 소유한 그 의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만 사용한다. 그 잣대를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들이대면서 말이다. 혹시 우리에게는 이러한 바리새인적인 모습이 있지는 않은가? 카일 아이들먼은 『나의 끝, 예수의 시작』(두란노)이라는 신간을 통해 만약에 우리가 다음과 같이 할 때면 틀림없이 바리새인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라고 말할 때이다. 교만은 비판이나 지적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즉,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지적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기분이 나쁘다는 투로 대꾸한다. 당신에게 사랑의 지적과 비판을 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흠잡을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괜히 지적했다가 서로 얼굴만 붉힐 줄 뻔히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라고 말할 때이다. 교만은 자석처럼 갈등에 끌린다. 그리고 교만은 사소한 언쟁을 큰 싸움으로 키운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입술에서 “내 잘못이야. 용서해 줘”라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교만이 극심한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사과하지 않는다. 가끔 사과할 때면 “미안하긴 하지만”이라는 조건부 사과가 따를 뿐이다. 세 번째, “이건 공평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불공평해 보인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축하할 줄 모른다면 필시 교만의 병에 걸린 것이다. 이미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것도 같은 병의 증상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무엇에도 감사할 수 없다. 네 번째, “혹시 너도 들었니?”라고 속삭일 때이다. 바리새인은 험담하기를 좋아한다. 험담을 하면 자신이 더 빛나 보일 수 있다. 바리새인은 어디를 가나 세리 한두 명쯤은 쉽게 찾아내다. 다른 이의 실수는 인간 탑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편리한 사다리가 되어 준다. 다섯 번째,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냥 확인만 해 주세요”라고 하면서 자기 없이는 천국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알리고자 할 뿐이다. 여섯 번째, “내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라고 말할 때이다. 바리새인은 주변에서 문제를 찾을 뿐 거울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금방 알아차리지만 자신의 잘못은 잘 보지 못한다.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못된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인간의 궁극적인 죄인 교만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만을 ‘의’로 포장하고 있는 경우일 것이다. 세리의 태도에서 자신의 교만을 발견하기보다는 도리어 세리를 비난한다(눅 18:11). 생각과 행동을 볼 때 바리새인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결코 바리새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무지와 교만은 늘 우리 곁에 있기에 우리는 한 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